창의성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AI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몇 초 만에, 수천 편의 작품을 학습한 결과물로. 이것을 창조라고 불러야 하는가.
AI가 쓴 시 한 편을 읽었다고 상상해보자. 꽤 좋다. 그런데 그 사실이 오히려 불편하다. 좋다고 느껴지는데,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 그 빈자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창의성에 대한 오해
창의성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는,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행위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인류의 예술과 사상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순수한 의미의 무(無)로부터의 창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중세의 이야기들을 변형했다. 피카소는 아프리카 조각에서 영감을 받았다. 베토벤은 하이든에게서 배웠다. 창조는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것들 사이의 새로운 연결이었다.
그렇다면 AI도 같은 방식으로 창조하는 것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AI는 이유 없이 창조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AI는 이유 없이 창조한다.
인간의 창조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다. 표현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반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던 무언가의 분출이었다. 카프카가 글을 쓴 것은 자신을 짓누르는 존재의 불안을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AI에게 내면이 있는가. 아직 아무도 확신하지 못한다.
작품 뒤에 있는 이야기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 중 '작업(work)'을 세계에 무언가를 더하는 행위로 보았다. AI도 세계에 무언가를 더한다. 그러나 그 작품 뒤에 어떤 삶이 있는지는 다르다.
인간의 작품 앞에서 우리가 감동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누군가의 삶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반 고흐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그림만 보는 것이 아니다. 그 그림 뒤에 있는 삶을, 고통을, 시간을 함께 느낀다.
창의성은 결과물에 있는가, 아니면 과정에 있는가. 완성된 작품이 얼마나 새롭고 아름다운지가 창의성을 결정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만들어낸 존재의 내면과 경험이 창의성을 결정하는가.
만약 전자라면, AI는 이미 창의적이다. 만약 후자라면, 창의성은 여전히 인간만의 영역에 가까이 있다. 어느 쪽이 옳은지 이 에세이는 답하지 않는다. 다만 이 질문을 품고 걷는 것이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