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이 가득 차 있으면 더 이상 아무것도 담을 수 없다. 이것은 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정이 꽉 찬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가 와도 받을 자리가 없다. 생각이 꽉 찬 사람에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와도 들어올 틈이 없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채우는 것을 성장이라고 배웠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하고, 더 많이 가지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40대에 접어들면서 이상하게도 더 채울수록 오히려 더 피곤하고 더 공허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역설의 이유를 이번 호에서 살펴본다.
새로운 것이 들어오려면
먼저 자리가 있어야 한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어렵다.
바쁜 것은 안도감을 준다. 일정이 꽉 차 있으면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Vol.7에서 달력이 꽉 찬 사람이 반드시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채움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리기 쉽다. 빈 시간이 생기면 불안해서 무언가를 채워 넣는다. 그 채움이 실제로 가치 있는 것인지는 묻지 않은 채.
물건도 마찬가지다. 쓰지 않는 물건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으면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물건들이 눈에 띌 때마다 인지적 부하를 만든다. 뇌는 보이는 것들을 모두 처리하려 한다. 시각적 혼잡이 정신적 혼잡으로 이어진다.
빈 시간이 생기면 즉시 무언가를 채운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불안하다. 쉬는 것에 죄책감이 든다. 공백을 견디지 못한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전에 기존 것을 정리하지 않는다. 계속 쌓이기만 한다. 읽지 않은 책, 보지 않은 강의, 쓰지 않는 물건들이 늘어난다.
많이 하는데 아무것도 깊어지지 않는다. 넓게 펼쳐져 있지만 얕다. 집중이 없고 흔적이 없다. 바쁘지만 축적되는 것이 없다.
비워야 할 공간은 세 가지 차원에 존재한다. 물리적 공간, 정신적 공간, 시간적 공간. 이 셋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가 막히면 나머지도 막힌다. 하나를 비우면 나머지도 함께 열린다.
선불교에는 '공(空)'의 개념이 있다. 비어 있음이 곧 가능성이다. 그릇이 비어 있어야 무언가를 담을 수 있고, 공간이 비어 있어야 무언가가 들어올 수 있다. 이것은 동양 철학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대 심리학도 같은 것을 말한다.
멍때리기 연구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활성화되는 시간 — 에 창의적 통찰이 가장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샤워 중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뇌가 외부 자극에서 해방될 때, 내부에서 연결이 일어난다. 비움은 게으름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생산성이다.
비움은 한 번에 다 할 필요가 없다. 오늘 하나, 이번 주 하나. 작게 시작해도 효과는 즉각적이다.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한다. 각 차원에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을 정리해봤다.
언젠가 필요할 것 같은 불안. 버리면 후회할 것 같다. 그러나 6개월 동안 손대지 않은 것은 앞으로도 손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후회하는 경우는 드물다.
정체성과 연결된 것들. 오래된 업무 자료, 과거의 성과물, 예전의 명함들. 이것들을 버리는 것이 그 시절의 나를 지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과거는 물건에 있지 않다.
비움 후의 공백이 두렵다. 비우면 허전하다. 그 허전함을 견디는 능력이 비움 근육이다. Vol.12에서 다룬 고독 능력과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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