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바닷가 어느 한적한 곳에 지안이 자주 찾는 자리가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릿속이 정돈되기 때문이다. 파도 소리가 생각의 소음을 밀어내고,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선이 어딘가 시원한 느낌을 준다. 지안은 그곳에서 주로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다.
그날도 그랬다.
수평선을 바라보던 어느 날, 불현듯 한 문장이 떠올랐다.
이대로 괜찮은가.
처음에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라고 여겼다. 누구나 한번쯤 하는 그런 질문. 그러나 그 문장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다음날 아침에도, 출근길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계속 떠나지 않았다. 지안을 조용히 따라다니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질문은 불편했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다지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돌아보니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디를 향해 달렸는지 모르겠다는, 그 이상한 공허함.
지안은 이 공허함의 시작을 찾기로 했다.
처음에는 답을 철학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이 질문과 씨름해 왔으니, 어딘가에 지안이 찾는 답이 있을 거라고. 지안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글을 읽었고, 실존주의를 파고들었고,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와 긍정심리학, 웰빙 이론 등을 들여다보았다.
좋은 글과 울림이 있었지만, 책을 덮고 나면 늘 같은 자리였다. 생각은 달라졌지만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래 탐색 끝에 지안은 찾고 있는 답이 철학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철학은 충분히 깊고, 충분히 지혜로웠다. 문제는 지안 자신이었다. 지안은 삶을 더 잘 이해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통찰을 넘어 행동이 필요했고, 생각의 틀을 지나 삶의 틀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질문이 바뀌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서 "지금 내 삶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로.
그 질문을 붙들고 이것저것 뒤지다가 지안은 낯선 개념을 만났다. 삶의 구조. 철학책에는 볼 수 없던 단어였다. 하지만 처음 이 개념을 접했을 때, 오랫동안 찾던 것이 여기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삶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설계하는 것. 의미를 찾는 것을 지나 구조를 만드는 것.
이 책은 그 탐색의 기록이지 완성된 답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붙들고, 그 답을 찾아 삶의 구조를 다시 설계하려 한 한 사람의 여정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지안은 아직도 그 길 위 어디쯤엔가 있다.
하지만 지안은 이것만큼은 말할 수 있다. 질문을 바꾸자 삶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구조로 살 것인가."
이 질문이 지안에게 삶의 두 번째 챕터를 열게 했다.이 책에서 지안은 나이기도 하고, 어쩌면 당신이기도 하다. 지안의 이야기는 특정한 누군가의 실화가 아니라, 삶의 전환점에서 비슷한 질문을 마주한 사람들의 보편적인 여정을 담고 있다.
젊을 때 지안은 막연히 믿었다. 나에게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게 무엇인지는 몰랐다. 특별한 재능일 수도 있고, 남다른 감각일 수도 있고, 아직 꺼내지 못한 어떤 가능성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형태는 없었지만 확신은 있었다. 언젠가는 나올 거라고. 기회가 오면 드러날 거라고. 그때를 위해 지금은 그냥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그 믿음이 어디서 왔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부모님이 심어준 것도 아니었고, 누가 그렇게 말해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젊음 자체가 그런 감각을 준 것인지도 모른다. 펼쳐진 시간이 무한히 많은 것처럼 느껴질 때,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능성을 크게 보기 마련이다.
나쁜 믿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믿음이 버팀목이 됐다.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어도,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지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아직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다. 언젠가 진짜 내가 나올 것이다. 그 언젠가를 향해 지금은 때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중년의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그냥 평범한 삶이었다.
특별히 문제된 것은 없었다. 직장을 다녔고, 가정을 꾸렸고, 나름대로 책임을 다했다. 주변 사람들 눈에는 잘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럭저럭 괜찮은 삶.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지안 안에 있다고 믿었던 그 무언가는 아직 한 번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언젠가 나올 거라고 기다렸는데, 기다리는 사이에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30대가 가고, 40대가 가고, 50대가 됐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젠가라는 말이 점점 공허하게 들렸다. 언젠가는 도대체 언제인가.
다니엘 레빈슨은 《인생의 사계절》에서 40대 초반에서 50대 초반 사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의 삶이 정말 자신이 원한 것이었는가, 남은 시간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이 찾아오는 것은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다. 인간 발달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더 불편한 질문이 뒤따라왔다. 혹시 처음부터 그 무언가는 없었던 게 아닐까. 젊음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던 게 아닐까. 지안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고, 그 평범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무언가가 내 앞에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 지안은 그 자리에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
사람마다 이 감정을 처음 느끼는 시점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40대 초반에 느낀다. 조직 안에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보이지 않을 때, 혹은 처음으로 후배가 자신을 추월하는 걸 목격할 때. 어떤 사람은 50대에 느낀다. 퇴직이 갑자기 현실적인 이야기로 다가오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자신이 이제 다음 차례라는 것을 실감할 때.
시점은 달라도 느낌은 비슷하다.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디를 향해 달렸는지 모르겠다는 것.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살아온 것 같은데, 막상 돌아보면 그 무언가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남은 시간이 예전만큼 많지 않다는 것까지.
이 감정을 처음 느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애써 무시하려 한다. 바쁘게 지내면 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을 거라고. 혹은 반대로, 갑자기 큰 변화를 시도한다. 직업을 바꾸거나, 새로운 취미를 찾거나, 환경을 바꾸거나. 무언가 바뀌면 그 공허함이 채워질 거라고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는다.
지안은 공허한 그 느낌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불편했다. 지금까지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애써 외면해봤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덮어두면 잠시 안 보일 뿐이지, 거기에 계속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무거워질 뿐이었다.
그래서 지안은 이 질문을 붙들기로 했다.
지안 안에 있다고 믿었던 그 무언가는 정말 없었던 것인가. 아니면 꺼낼 방법을 몰랐던 것인가.
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을 붙들고 있으면서 조금씩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언가의 있고 없음이 핵심이 아니었다. 문제의 핵심은 지안이 그것을 꺼낼 수 있는 구조로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젊을 때 믿었던 그 무언가. 그것은 원래 없었던 것도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한 번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채, 거기 그 자리에 있었다.
지안은 그것을 다시 찾기로 했다. 이번에는 언젠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내 안에서 꺼내기로.
실존주의를 처음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서점에서 눈에 띄는 제목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르트르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철학자, 실존주의,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하지만 그 이상은 몰랐다. 그냥 요즘 지안의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들과 비슷한 색깔을 가진 책 같아서 집어 들었다.
첫 장을 읽는데 순간 멈추게 되는 문장이 있었다.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장-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처음에는 무겁게 느껴졌다. 내던져졌다는 표현이 너무 거칠었다. 태어난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다니. 하지만 읽을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거칠기는 했지만, 정확한 표현이었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았다. 태어날 시대를, 태어날 나라를, 태어날 가정을. 어떤 언어를 쓸지,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랄지, 어떤 경제적 조건 위에 설지. 그 어느 것도 내가 고른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됐다. 내던져진 것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이것을 피투성(被投性)이라 불렀다. 하이데거에게서 가져온 개념이었지만, 사르트르는 거기에 더 날카로운 결론을 붙였다.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고.
의자는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설계도가 있다.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 그런데 인간은 반대다.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간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처음에는 그것이 지안에게 자유처럼 들렸다. 정해진 것이 없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깊이 읽을수록 그 자유가 무겁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해진 것이 없다는 말은, 변명의 여지도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성인이 된 이후 지안의 삶은 시대 탓도, 환경 탓도, 운 탓도 아니다. 지안은 지금껏 자신이 선택한 대로 살아온 것이다. 설령 그 선택이 의식적이지 않았더라도, 흘러가는 대로 그냥 따른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사르트르는 그것을 외면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 외면을 자기기만(mauvaise foi)이라 불렀다.
지안은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았는가.
솔직하게 돌아보면, 아니었다. 지안은 대부분 주어진 것들을 따라 살았다. 사회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조직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가족이 필요로 하는 역할로. 이십대에는 취업이 목표였고, 삼사십대에는 승진이 목표였고, 오십대에는 버티는 것이 목표였다. 그 목표들이 지안이 진심으로 원해서 세운 것이었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쉽지 않았다. 그냥 그때그때 앞에 보이는 것들을 했다. 주어진 레일 위를 그저 묵묵히 달렸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쁜 삶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진심을 다했고, 소중한 것들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이 지안이 온전히 선택한 삶이었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이 그 질문을 너무 선명하게 만들어버렸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지안은 그것을 해왔는가.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온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서 주어진 본질을 살아온 것인가.
철학이 위안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존주의는 반대였다. 위안을 주는 대신 상처를 건드렸다.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삶을 직면하게 만들었다. 사르트르는 따뜻하게 안아주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거울을 들이미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한 거울을.
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프면서도 계속 읽고 싶었다. 불편하면서도 자꾸 그 질문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 질문들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처음으로 진짜 지안을 건드리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 표면만 긁어왔는데, 처음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 닿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르트르를 읽고 나서도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남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가.
본질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선택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고 했다. 자기기만을 멈추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울림도 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부터 바꿔야 하는지, 어떻게 그 본질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철학이 진단은 해주었지만 처방은 주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옳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리고 그 아픔이 지안을 다음 질문으로 밀어넣었다.
사르트르 이후에도 지안은 계속 읽었다. 진단은 받았는데 처방이 없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다른 것을 찾아봤다.
프랭클은 정신과 의사였고,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다. 그가 수용소에서 발견한 것은 단순했다. 삶의 의미가 있는 사람은 어떤 극한의 고통도 견딜 수 있다는 것.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인용로고테라피의 핵심은 의미를 향한 의지(will to meaning)였다. 프로이트가 쾌락을, 아들러가 권력을 인간의 근본 동기로 본 것과 달리, 프랭클은 의미를 향한 갈망이 인간의 가장 깊은 동기라고 보았다.
깊은 울림이 있었다. 지안은 한동안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이후에도 오래 남았다. 삶의 구조를 다시 짜게 됐을 때, 의미를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프랭클 덕분이었다.
이키가이는 일본의 전통 철학이다. 오키나와의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게 만드는 이유가 한 가지씩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장수마을의 비결로 알려져 있다.
오키나와의 시골 사람들은 거창한 의미가 아닌 삶의 작은 부분들에서 삶의 기쁨을 느낀다. 손주를 돌보거나 이웃과 담소를 나누는 시간 등 일상의 작은 활동에서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느끼는 것. 부와 명예가 아닌 일상의 작은 행복과 보람이 장수의 원천임을 알 수 있었다.
셀리그만은 《플로리시》에서 인간의 웰빙이 다섯 가지 독립적인 요소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Positive Emotion (긍정적 감정) · Engagement (몰입) · Relationships (관계) · Meaning (의미) · Achievement (성취)
이 프레임은 나중에 지안이 삶의 5가지 영역을 설계하게 됐을 때 중요한 참조점이 됐다.
플로우는 어떤 일에 완전히 몰입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상태를 말한다.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에서 플로우가 일어나는 조건을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도전 수준과 기술 수준이 균형을 이룰 때, 명확한 목표가 있을 때, 즉각적인 피드백이 있을 때 플로우는 일어난다. 이 조건들은 나중에 일의 구조를 설계할 때 중요한 단서가 됐다.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야 본질이 보인다는 통찰. 삶의 구조를 새로 짤 때, 지금 하고 있는 것들 중 무엇을 덜어낼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 것은 미니멀리즘의 영향이었다.
이쯤 되자 전체 윤곽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각각의 철학과 개념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유익했다. 로고테라피와 이키가이는 의미의 중요성을 심어줬고, 긍정심리학은 건강한 삶의 구성 요소를 구체화해줬고, 미니멀리즘은 덜어내는 것의 가치를 알게 해줬다. 어느 것도 헛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공통적으로 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실제로 지금 당장 내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어떤 순서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방향은 있는데 지도가 없었다. 비전은 있는데 설계가 없었다.
지안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더 좋은 철학이 아니었다. 삶을 실제로 설계하고, 바꾸고, 만들어갈 방법이었다.
질문이 바뀌고 나서도 한동안은 같은 자리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서 "어떻게 삶을 바꿀 것인가"로 질문이 달라졌다고 해서 갑자기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꽤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문제를 다르게 정의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으니까.
한동안 지안은 여전히 습관적으로 책을 찾았다. 이번에는 자기계발서 쪽으로 눈을 돌렸다.
습관에 관한 책을 읽었다. 아주 작은 변화부터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지안은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열흘쯤 지속됐다. 목표 설정에 관한 책도 읽었다. 노트를 꺼내 목표를 써봤다. 보름쯤 지속됐다. 마인드셋에 관한 책도 읽었다. 맞는 말이었다.
읽을 때는 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속되지 않는 것이 반복되었다. 좋다고 하는 방법론들을 소비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지안은 지금의 과정 자체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안은 지금까지 삶을 바꾸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정작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정의해본 적이 없었다. 방법론은 넘쳐났다. 그러나 그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체계화할 어떤 틀은 정해진 게 없었다.
심리학자 피터 골위처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좋은 의도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의지력 부족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 구조의 부재라고 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면, 아무리 강한 결심도 바쁜 일상의 관성에 묻혀 버리고 만다.
지안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방법론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적용 대상과 구체적인 실행 구조가 없었다.
그즈음 지안은 오래된 질문 하나를 다시 꺼냈다. 나는 지금 무엇이 불만인가. 막연하게 삶이 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는데, 정확히 무엇이 불만인지를 짚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 밤 노트를 꺼내 적어봤다. 있는 그대로, 아주 솔직하게.
일이 먼저 나왔다. 지금 하는 일이 크게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수입이 나왔다. 한 곳에서만 들어오는 수입이 불안하다.
관계가 나왔다. 깊이 있게 연결된 사람이 많지 않다.
건강이 나왔다. 관리를 못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미루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장 묵직한 것이 나왔다. 내 삶에 명확하게 느끼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적어놓고 보니 처음으로 지안의 삶의 불만이 눈에 보였다. 막연하게 느껴지던 것들이 구체적인 언어를 갖게 됐다.
그런데 적어놓고 나서 또 막막함을 느꼈다. 이것을 알았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하지만 바로 거기서 지안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지안은 생각하는 단계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이해하고, 파악하고, 분석하고, 또 이해하고. 그러나 행동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가 없었다. 아는 것과 하는 것 사이를 연결할 다리가 없었다.
통찰은 충분했다. 오히려 넘쳤다. 문제는 그 통찰을 실제 삶의 변화로 연결하는 구조가 없다는 것이었다.
구조. 그 단어가 처음으로 머릿속에 들어왔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지안은 직장에서 늘 구조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떤 프로세스로 일을 진행할지, 어떤 체계로 협업할지. 일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구조를 생각했다. 구조 없이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삶에는 구조를 적용한 적이 없었다. 업무에 관해서는 설계하는 사람이었는데, 삶에서는 흘러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삶은 그런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삶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고, 그냥 열심히 살다 보면 되는 거라고.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그것을 담을 구조가 없으면 이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 있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도, 건강을 챙기겠다는 다짐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겠다는 의지도 — 그것을 실제로 작동하게 하는 일상의 구조가 변하지 않으면 결국 흐지부지해진다.
지안이 읽은 책들이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안이 게으른 것도, 의지가 약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것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없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얻어도 담을 그릇이 없으면 다 흘러 나가버린다.
그릇. 구조. 설계.
이 세 단어가 머릿속에서 하나로 연결되기 시작했다.그날 이후 지안은 방향을 바꿨다. 더 좋은 통찰을 찾아 계속되고 있는 지식 쇼핑을 멈췄다. 대신 자신의 삶의 구조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지금 어떤 구조로 살고 있는가. 지금의 구조가 지안이 원하는 삶과 과연 맞는가. 맞지 않다면 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질문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서, "어떤 구조로 바꿀 것인가"로.
이것이 지안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데려갔다. 철학이 아니라, 삶의 설계라는 낯선 개념으로.
구조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지안은 막상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 기사 하나를 읽었다. 도시 설계에 관한 것이었다. 도시의 구조가 사람들의 행동을 어떻게 바꾸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보행로의 위치, 공원의 배치, 상점의 동선 — 이런 것들이 사람들이 얼마나 걷는지, 어디서 모이는지, 어떻게 시간을 쓰는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이미 설계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구조는 바꿀 수 있다.
그렇다. 우리 삶의 거의 모든 것이 누군가 설계한 것이다. 아침 몇 시에 일어나야 하는지, 하루에 몇 시간을 일해야 하는지, 몇 살에 학교를 가고, 몇 살에 취업을 하고, 몇 살에 은퇴를 하는지. 이 모든 것은 산업화 이후 사회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패턴이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작동하고 있어서, 우리는 삶이 정교하게 설계된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지안도 그랬다. 그 구조 안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 한 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삶이란 이런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시 설계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 인간도 프로그램처럼 자신의 환경과 성장과정으로부터 코드를 입력받는다. 태어난 시대, 자란 환경, 받은 교육, 속한 조직이 입력된 코드들이다. 우리는 그 코드대로 움직이지만, 그것이 코드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는 코드를 바꿀 수 있다. 버그를 발견하면 수정하고, 더 나은 방식이 있으면 리팩토링한다. 삶도 마찬가지다.
사르트르가 말한 "본질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비로소 손에 잡히는 말이 됐다. 철학적 선언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 것이 됐다. 철학은 왜를 말했고, 설계는 어떻게를 말하고 있었다.
리처드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은 《넛지》에서 이것을 '선택 설계(choice architecture)'라고 불렀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구조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주어진 환경이 만들어놓은 기본값(default)을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코넬대학교의 카페테리아 실험이 있었다. 건강한 음식을 눈높이에, 손이 먼저 닿는 곳에 배치했을 때 학생들의 건강 식품 선택률이 25% 이상 증가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해서 그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구조가 선택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것이 지안 안에서 커다란 무언가와 연결됐다. 지안은 지금까지 더 나은 삶은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매번 원래 자리로 되돌아온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구조의 문제였다.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행동은 잘 바뀌지 않는다. 반면에 구조가 잘 설계되어 있으면, 굳이 의지를 쥐어짜지 않아도 원하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이것이 지안이 찾던 연결고리였다.
물론 코드를 바꾼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오랫동안 굳어진 패턴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삶에는 관성이 있고, 얽힌 관계가 있고, 예측할 수 없는 변수들이 끊임없이 들어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관점이 지안에게 유용했던 것은, 삶을 바라보는 프레임 자체를 바꿔줬기 때문이다. 지금의 삶은 지금까지 입력되어 온 코드의 결과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삶은 어떤 코드를 새로 입력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삶의 5가지 영역을 하나씩 설계하고,
3년의 전환 리듬을 세우고, AI 시대의 라이프 2.0을 그려가는 12개의 장이 이어집니다.
프리미너 · FreeMeaner — Life Redesign Frame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