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맺어온 관계의 절반은
직함과 함께 사라진다.
그 후에 남는 이름들을 묻는다.
인간의 모든 고민은
대인관계에서 비롯된다.
관계 도메인 (가지) · 전환기 관계 재편
직함에 의존했던 관계 구조를 점검하고, 의미 중심으로 새로 설계하는 작업
스무 살의 알프레드 아들러는 병약한 아이였다. 형의 그늘 아래 자란 그는 의사가 되어서도 한 가지 질문에 매달렸다. 인간을 가장 깊이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 프로이트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개인심리학'을 세운 그는 수십 년의 임상 끝에 한 문장으로 답했다. 모든 고민은 결국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혼자라면, 고민도 없다는 뜻이다.퇴직을 앞둔 어느 직장인이 책상 서랍을 정리한다. 삼십 년 동안 쌓인 명함이 한 무더기다. 부장, 이사, 협력업체 담당자, 후배들. 그 많던 이름 중 정년 이후에도 안부를 물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 선뜻 헤아려지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순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사번이 사라지자 단체 채팅방의 알림도 함께 잦아들고, 점심 약속을 잡던 동료들의 안부는 한 달, 두 달이 지나며 자연스레 뜸해진다. 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매개로 맺어졌던 관계의 구조가 함께 사라진 것이다.
외로움은 혼자 있어서가 아니라, 곁에 있던 구조가 사라져서 온다.
사람들은 이 공허함을 일이 그리워서라고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리운 것은 업무 자체가 아니라 매일 누군가와 마주치던 그 리듬이었음을 알게 된다. 아들러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공허함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관계를 새로 설계해야 한다는 신호라고.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은 인간의 모든 행동을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읽는다. 그에게 열등감도, 우월 욕구도, 결국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감정이었다. 혼자 있는 인간에게는 열등감도, 자존심도, 인정 욕구도 존재할 자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그 고민을, 세상에 당신 혼자만 있다면 여전히 고민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승진에서 밀린 일, 자녀와의 거리, 배우자와의 서운함, 친구의 무심한 말 한마디. 어느 것도 타인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고민은 누군가와의 거리에 관한 이야기다.여기서 흔한 오해가 생긴다. 관계가 줄어드는 것을 두고 사람들은 스스로를 탓한다. 사람들을 소홀히 했다고. 그러나 직장이라는 공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곳은 애초에 의지로 맺은 관계가 아니라 출근이라는 구조가 강제로 만들어준 관계였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마주쳤을 뿐이다. 그 구조가 걷히면 관계도 함께 걷힌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평생 일에 의존해 관계를 맺어온 사람일수록, 구조가 사라진 자리에서 더 크게 휘청일 뿐이다.
구조가 사라지면, 의지만으로는 관계가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전환기에 필요한 것은 더 노력하는 마음이 아니라, 관계를 의도적으로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프리미너의 FM-Tree에서 관계는 가지에 해당한다. 가지는 줄기와 뿌리에서 영양을 받아 자라난다. 직장이라는 가지 하나가 잘려도, 뿌리(의미)와 줄기(건강)가 단단하면 새로운 가지는 다시 돋아난다. 문제는 그동안 관계라는 가지를 일이라는 가지에만 매달아 두었다는 점이다.
아들러는 또 하나의 도구를 남겼다. 바로 과제 분리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타인의 과제이고, 그 평가에 흔들리지 않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은 온전히 나의 과제다. 전환기의 관계 설계는 이 구분에서 시작된다.
직장이 제공하던 관계는 뿌리가 아니라 가지 끝의 잎이었다. 잎이 떨어진다고 나무가 죽지 않는다. 다만 그 가지가 어디에서 뻗어 나왔는지를 다시 확인할 필요는 있다.
관계 도메인을 새로 설계한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을 만나려 애쓰는 일이 아니다. 의미(뿌리)와 일치하는 소수의 동행자를 의식적으로 골라, 구조 없이도 유지되는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퇴직을 앞둔 누군가에게 가장 먼저 권하고 싶은 일은 새로운 명함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지금의 명함을 잠시 내려놓고, 그 직함 없이도 안부를 물을 사람의 이름을 적어보는 일이다.
그 목록이 짧다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아들러의 말처럼 그것은 의지의 실패가 아니라 구조의 결과였을 뿐이다. 이제 할 일은 같은 구조를 그리워하는 대신, 다음 구조를 직접 설계하는 것이다.
관계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설계하는 것이다.한 사람, 한 사람과의 거리를 다시 가늠해보는 일에서 전환기의 관계 재편은 시작된다.
명함이 사라져도 남는 이름이,
당신이 다시 심어야 할 첫 번째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