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너 라이프 2.0 시리즈 2 · 1부
라이브러리 · AI 시대, 세상이 바뀔수록 더 중요해지는 것들 · Chapter 2
Chapter 2 · 실존주의적 시각

답은 밖에 있지 않다

— 실존주의적 시각
읽기 약 7분·1부 · 세상과 인간을 새롭게 보다

지안은 인생에 모범답안이 정해져 있다고 믿었다.

좋은 직장, 안정된 수입, 사회가 인정하는 위치. 삶의 목표가 정해져 있었고 그것들을 향해 걷기만 하면 되었다. 지안은 그 방향을 따랐고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도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방향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지안은 처음으로 물었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한 것이었는가.

외부가 설계한 삶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외부의 기준 속에 놓인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 집. 이 기준들은 너무 오래되고 너무 광범위해서 마치 자연의 법칙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외부의 기준을 따랐을 뿐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그 기준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기준이 나의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외부의 기준을 따르는 삶은 일정 기간 잘 작동한다. 방향이 명확하고, 평가가 분명하고, 비교가 가능하다. 열심히 하면 올라가고, 올라가면 인정받는다. 그 구조 안에서 성실하게 살기만 하면 되었지만, 그 구조의 끝에 다다랐을 때, 혹은 그 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종종 예상치 못한 공허함을 마주한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렇게 공허한가.

이것은 게을러졌다는 신호가 아니라, 외부의 기준으로 채운 삶이 내면의 공백을 메우지 못한다는 신호로 보아야 한다.

실존주의가 묻는 것

20세기 철학자들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간다. 신이 인간을 특정 목적을 위해 설계하지 않았듯, 삶의 의미와 방향도 미리 주어지지는 않았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존재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다르게 표현했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우리는 태어날 시대, 태어날 장소, 태어날 조건을 선택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조건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었다. 아니, 선택해야만 했었다. 그 선택을 회피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카뮈는 더 냉정했다. 세상은 원래 의미가 없다. 그 무의미함 앞에서 인간이 의미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었다. 삶은 반항이 아니라 직면하는 것이었다.

카뮈는 시지프스 신화에서 이 조건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시지프스는 신들의 벌을 받아 거대한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려야 했고 정상에 도달하면 바위는 다시 굴러 내려온다. 그리고 다시 밀어 올려야 한다.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형벌이었다. 카뮈는 이것을 인간에 비유했다. 인간은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 노력하지만 세상은 그 물음에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 의미를 원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상 사이의 충돌. 이것을 카뮈는 부조리라고 불렀다.

부조리 앞에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다. 삶을 포기하거나, 종교나 이념에서 의미를 빌려오는 것, 아니면 부조리를 외면하는 것. 카뮈는 이들 세 가지를 모두 거부했고 인간은 부조리를 직면한 채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카뮈는 이렇게 썼다. 시지프스는 행복해야 한다고. 바위가 다시 굴러 내려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내려가 바위를 미는 그 행위 자체에 존엄이 있다는 것이다. 결과에 개의치 않고 삶을 직면하는 태도 자체가 인간의 조건이었다.

자유와 책임의 구조

실존주의가 불편한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유를 말하는 동시에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기준을 따르는 삶은 편하다. 잘못되면 기준을 탓할 수 있고, 시대를 탓할 수 있고, 사회 구조를 탓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선택으로 산다는 것은 그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자신이 안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두렵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외부의 기준에 기댄다. 선택을 외부에 위임하는 것이 책임을 위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선택을 위임해도 삶은 여전히 자신이 살아야 한다. 따라서 책임은 결코 위임될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자유는 가능성이고, 책임은 그 가능성을 진지하게 다루는 태도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자유와 책임의 문제는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에서도 언급되었다. 프랭클에게 자유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수용소에서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남은 마지막 자유가 그것이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서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자유는 책임과 분리되지 않는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선택에 책임진다는 것이다. 프랭클은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 동쪽에 있다면 책임의 여신상이 서쪽에도 세워져야 한다고 말했다. 자유만 있고 책임이 없으면 방종이 되고, 책임만 있고 자유가 없으면 삶은 의무가 된다. 의미는 이 지점에서 생겨난다.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 선택을 진지하게 책임지는 과정에서 삶은 의미를 갖게 된다.

프랭클은 실존주의의 언어를 썼지만 방향이 달랐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세상에 원래 의미가 없다는 것에서 출발했다면, 프랭클은 의미는 항상 존재한다고 봤다. 실존주의가 의미 없음을 직면하라고 한다면, 프랭클은 의미를 발견하라고 했다. 이 차이가 그를 실존주의자가 아닌 다른 자리에 세운다. 이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이어진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실존주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각자가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것이고, 다만 그 발견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질문을 던진다.

나는 지금 누구의 기준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실제로 내가 원한 것인가.

외부의 인정이 사라졌을 때도 나는 지금 하는 일을 할 것인가.

삶의 끝에서 돌아봤을 때 이 시간들이 의미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불편하다. 그러나 이 질문들을 피하는 한, 삶의 재설계는 시작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이 외부의 구조가 크게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자신만의 기준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답은 밖에 있지 않다. 찾아야 할 곳은 내 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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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이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