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02 · 1부

사르트르가 옳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실존주의를 처음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서점에서 눈에 띄는 제목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사르트르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철학자, 실존주의,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하지만 그 이상은 몰랐다. 그냥 요즘 지안의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들과 비슷한 색깔을 가진 책 같아서 집어 들었다.

첫 장을 읽는데 순간 멈추게 되는 문장이 있었다.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다.

장-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처음에는 무겁게 느껴졌다. 내던져졌다는 표현이 너무 거칠었다. 태어난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다니. 하지만 읽을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거칠기는 했지만, 정확한 표현이었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았다. 태어날 시대를, 태어날 나라를, 태어날 가정을. 어떤 언어를 쓸지,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랄지, 어떤 경제적 조건 위에 설지. 그 어느 것도 내가 고른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됐다. 내던져진 것이다.

실존주의 핵심 개념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이것을 피투성(被投性)이라 불렀다. 하이데거에게서 가져온 개념이었지만, 사르트르는 거기에 더 날카로운 결론을 붙였다.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고.

의자는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설계도가 있다.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 그런데 인간은 반대다.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간다.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처음에는 그것이 지안에게 자유처럼 들렸다. 정해진 것이 없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깊이 읽을수록 그 자유가 무겁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해진 것이 없다는 말은, 변명의 여지도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성인이 된 이후 지안의 삶은 시대 탓도, 환경 탓도, 운 탓도 아니다. 지안은 지금껏 자신이 선택한 대로 살아온 것이다. 설령 그 선택이 의식적이지 않았더라도, 흘러가는 대로 그냥 따른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사르트르는 그것을 외면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 외면을 자기기만(mauvaise foi)이라 불렀다.

지안은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삶을 살았는가.

솔직하게 돌아보면, 아니었다. 지안은 대부분 주어진 것들을 따라 살았다. 사회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조직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가족이 필요로 하는 역할로. 이십대에는 취업이 목표였고, 삼사십대에는 승진이 목표였고, 오십대에는 버티는 것이 목표였다. 그 목표들이 지안이 진심으로 원해서 세운 것이었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쉽지 않았다. 그냥 그때그때 앞에 보이는 것들을 했다. 주어진 레일 위를 그저 묵묵히 달렸다.

그렇다고 그것이 나쁜 삶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진심을 다했고, 소중한 것들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그것이 지안이 온전히 선택한 삶이었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이 그 질문을 너무 선명하게 만들어버렸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지안은 그것을 해왔는가.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온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서 주어진 본질을 살아온 것인가.

철학이 위안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존주의는 반대였다. 위안을 주는 대신 상처를 건드렸다.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삶을 직면하게 만들었다. 사르트르는 따뜻하게 안아주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거울을 들이미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한 거울을.

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아프면서도 계속 읽고 싶었다. 불편하면서도 자꾸 그 질문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 질문들이 불편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처음으로 진짜 지안을 건드리는 질문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 표면만 긁어왔는데, 처음으로 마음 속 깊은 곳에 닿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르트르를 읽고 나서도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남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가.

본질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선택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고 했다. 자기기만을 멈추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울림도 있다. 그런데 그 다음이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부터 바꿔야 하는지, 어떻게 그 본질을 만들어가야 하는지.

철학이 진단은 해주었지만 처방은 주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옳았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리고 그 아픔이 지안을 다음 질문으로 밀어넣었다.

← 1장 목차 3장 →